북조선에서 한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회상, 북조선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의 세 종류 자료를 교차시켜 북조선의 문헌을 비판적으로 읽었다. 북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북조선의 신화적인 설명도 무엇이 진실인지
거창하게 소개되었고,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은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장으로서 양인은 북한과 남한의 지도자로 각각 지명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보다 신화화되고 성스럽게 되었는
만주로 이동해 살았다.
그 후 청년이 되자 고려 공산청년회 등 공산당 단체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함경남도 혜산진의 보천보를 점령했었던 이른 바 보천보 전투이다. 이 보천보 전투로 인해 김일성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걸출한 능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과의 관계가 큰 역할을 했다. 항일투쟁기에는 중공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동을 했고 북한 건국과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김정일이 당비서가 된 후 혁명 원로인 국가 부주석(최용건)과 정무원총리(김일)의 활동이 급격히 둔화
혁명 2세대나 실무형 지도자들의 발탁이 두드러지기 시작
3대혁명소조운동
1974년 2월 이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
‘혁명적 수령관’의 연장에서 후계자론을 제시
1.장남인 정남을 신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