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 엘리트에 다수의 김일성-김정일 친인척이 포진된 것은 충원조건에서 ‘충성심’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평가된다. 비록 황장엽씨와 같은 친인척중의 일부가 망명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북한 권력을 독점하면서 김일성-김정일의 권력승계를 다른 어떤 권력엘리트보다 충성스럽게 지탱하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많이 다르다.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을 '인류의 태양', '절세의 위인', '혁명의 위대한 전략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창조와 건설의 영재' 등으로 선전하여왔다. 반면 남한정부는 오랫동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사실을 부인하면서 북한주민들
공산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소련의 정책을 배경으로 공산당의 남북분립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만한 인물을 등용했는데, 그것이 중국공산당 밑에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귀국한 김일성 등의 빨치산 그룹이었다.
- 김일성은 평양의 소련군위사령부부사령 직함으로 북조선에 들어오게 됨.
1937년 6월에 감행한 보천보(普天堡)전투가 그것이다. 보천보 전투의 경우 김일성이 지휘하는 약 100명의 항일유격대가 동원된 전투로서 규모는 크지않았으나 그 파장은 매우 컸다.
- 당시 국내 언론들의 이례적 호외보도는 암흑기로 빠져든 식민지 조선 상황의 탈피욕구가 반영된 것이아닌가한다.
조선로동당이 합당되어 ‘조선로동당’이 되었고, 김일성은 여기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전쟁 휴전(1953.7.27.)전인, 1953년 2월8일, 조선인민군 창건 5주년에 조선인민군 원수에 취임하면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된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1945년~195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