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북한에서는 번역과 동화 시 창작
제1장. 1950년대-1960년대: 통일시 위협으로 인식되는 냉전기 시기
1.1. 한국전쟁 후 남북한의 통일정책 차이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은 각각 다른 통일정책을 추진하였다. 남한은 남침방지와 반공화국 전략을 채택하였으며, 북한은 남침퇴치와 통일전쟁 전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책 차이는 냉전시기의
있음’이라는, 지극히 도식화된 전개에 불과하다. 전쟁의 내막이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무시되어 왔다. 100만이라는 피해자를 낸 민간인 학살을 그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된 부분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과 그에 대한 교육 문제에 대해 서술하려고 한다.
시 적지 않은 편이다. 중앙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남북한 구성원들 상호간의 이해와 신뢰성을 쌓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교류가 증대되면서 중앙정부가 교류가 이루어지는 통로지역의 현장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교류 자체에 체계성을 띠지 못한 동시에 지나치게 방만하고 주먹구구식으로
북한측의 일방적 승리였다. 소련군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은 준비된 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장교와 부대에 대한 교육훈련 수준 역시 매우 낮았다. 그 결과 38선 상의 방어선은 “전투 직후에 전 전선에 걸쳐 와해되었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와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1권』, 군사편찬연구소,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