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비명」이라고 하는 네 승려를 위한 비문, 여기저기 실리거나 인용되어 있는 작품이 다수가 있다. 동문선을 보면 거기 실린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그 가운데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된다. 질뿐만 아니라 양에서도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동국문종(東國文宗)’이라는 평
Ⅰ. 개요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이 단순히 옛것을 숭상하고 맹종하기만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12세의 어린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는 점은 신분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자기 개발에 그가 얼마나 투철했으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얼마나 신고했는지를 말
> 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존>,<법장화상전>, <석이성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 뿐이고 그 외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등에 기(記), 원문(原文), 찬(讚) 등이 전할 뿐이다.
동아시안이자 신라인 최치원 : 그의 문학 세계
Ⅰ. 서론
차용주 교수는 작가가 문학사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선택이 되는 요건은 우수한 작품을 저작해야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든지 문학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孤雲 최치원(857~?)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