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三國史記에 대한 부정적 평가
삼국사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삼국사기가 지어진 이래로 계속되고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일연의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 사가에 의해서 또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사관 모두에게서 비판받았지만 비판의
향가는 신라사회에서 생성되었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였으며, 그 역사와 함께 소멸되어간 시가 장르이다. 이러한 향가는 생성된 공간성이나 시간이 모두 신라 문화에 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 향가는 신라라는 시공간의 영역 안에서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가에 대한 전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전하는,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된 궁지(宮池)였음이 밝혀 졌다. 그때까지는 안압지의 축조연대를 일인(日人)학자들이 주장하던 8세기 말로 보았었다.
또한 연못의 서편에서 발굴된 거대한 건물지도 문무왕 19년(679년)에 ‘동궁(東宮)’으로 지어져, 그 이래로 기록에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의 고대를 연구함에 있어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는 그 형식과 역사인식이 한층 세련되고 합리성을 갖춘 사서이지만, 그 합리성이 도리어 후대의 비판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다’는 신화에 대한 비판정신이 결과적으로
1. 서론.
《삼국유사》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삼국유사는 국가가 외적의 침임을 받아서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