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삼국시대에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지, 자료가 풍부한 신라를 중점에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유교개념 중에서 효를 집중적으로 다룬 효선편에 대해서는 이전 발표의 내용을 보완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논의를 정리한 논문을 소개하였다.
Ⅱ.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유교
1. 인물로 보
유교의 이론적 토대를 설립하였다. 설총은 스스로 복성거사라 불렀다. 그는 경서와 역사서를 통달하였으며 방음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여 육경과 문학에 토를 달아 풀이 하였으니 지금도 신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질 않고 있다.
4) 삼국유사속에서
삼국유사 2002 을유 문화사. p. 565~567
이하는 동일한 책은 삼국유사로 하겠다.
이때부터 이미 충의 개념이 통용되었으며 사군자적인 절개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나무의 등장이다. 국가적 위기에서 충을 논하는 것만으로 유교와 관련 있다 하는 것
Ⅱ.본론
1. 삼국유사속에 등장하는 유교와 관련된 인물
1) 물계자는 제 10대 남해왕 17년에 태자와 함께 변방을 지킨 인물이다. 삼국유사 p 565~567
남해왕 17년은 212년의 해이다. 이때부터 이미 충의 개념이 통용되었으며 사군자적인 절개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원문을 보면 직접적으로 유교의 개
유교적 전제정치의 이념이었다. 유교이념에 의거한 중앙귀족정치의 전제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에 유리가 크게 초래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리의 필연적 귀결은 오히려 그 체제내의 반목과 전통적인 자주의식의 상실로 까지 나타났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 고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