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당시 “한국정부는 서구의 교육제도와 발전된 기술문명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고 하였고, 선교사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땅에 교육기관을 세우고 그것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점에서 양쪽의 관심사가 일치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학교가 발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의 교회들은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역을 하겠다는 비전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역은 선교지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훨씬 더 민감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현대 선교 운동은 서구의 식민주의와 기술문명의
서구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시작된 이후 한국 개신교는 세계의 주목을 끌만큼 놀랍게 성장해왔다. 오늘날 4명중에서 1명은 개신교 신자일 정도로 한국 개신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왔다.이와 같은 개신교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이런 논의들은 당시 개신교가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이해와 신앙적 배경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선교사의 역할은 한국 개신교 정체성 수립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한국 개신교는 서구의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선교는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WCC 창립과 함께 서구선교 철수정책이 전개되면서 1954년 동아시아교회협의회에서 제 3세계 선교사 파송정책이 채택되면서 한국과 필리핀 등의 선교사가 태국으로 파송되기 시작했다. 그 후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들어서 제도적 교회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