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인구는 약 10만 명 선이었으며, 대부분 귀족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종사하는 군인, 각종 관청에서 사역되는 관노비와 가내 사노비들로 구성되었고 관할구역은 도성 안과 성 밖 10리(성저10리) 지역이었으며, 대체로 동쪽은 우이천과 중랑천까지 남쪽은 한강변과 용산에 이르렀으며, 서쪽은 양
. 그러나 1875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 급변하는 정국에 이어 1894년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을 겪으면서, 한성부에는 새로운 근대적 시설인 철도, 전차, 전신전화 등이 설치되고 서양식 학교, 병원, 상수도 등이 운용되어 외형적으로는 근대화의 모습을 나타냈다.
역사를 지녔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웠던 건축물도 사라져 이제는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변해 창경원이 되고, 일제강점기때 조선 총독부가 세워져 경복궁을 헤치기도 하였다. 덕수궁도 일제가 부지를 파는 바람에 원래 2000평에 달했던 궁은 비교할 수 없을 만
원칙적으로 도시화와 개발이 제한되는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936년의 영역 확장은 근대적인 도시화 과정에 의하여 진행된 도시 확장이 처음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36년에 서울에 포함된 주변부에 대한 고찰은 근대 초기의 서울 뿐 아니라 근대기 도시 변
서울시 중구 필동에 있는 이 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 조성으로 옮긴 것이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 누마루가 깔려 있고, 모두 17칸 반의 규모이다. 장대석 위에 초석을 놓고, 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