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의의 특성을 구명하여 한국농민운동이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Ⅱ. 1920년대소작쟁의 실태
1910년부터 1918년까지에 걸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소작농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에 소작농들은 자기 경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또 소작료율
농민들의 보수성을 유지하게 하는 지주 • 농민 간의 봉건적 인간 관계, 농촌 공동체적 질서(두레 등)는 급속히 붕괴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소작쟁의가 급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사상 • 주장이 농촌에 유입되었다. 1930년대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주도하고 빈농들이 기반
소작농 중심조직에서 자작빈농, 자작중농까지 포함했다. 지역적으로도 남부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지방, 동해안지방에서도 활발히 조직되었다.
2. 조선농민총동맹 창립(27.9)
산하 농민단체 수 27년 160개소, 28년 307개소이다. 그러나 각 지역의 농민조합의 실질적 지도부가 되지 못했다.
3. 쟁의 건수
1. 서론
지금 한국은 한미FTA로 떠들썩하다. 현재 체결이 된 상태지만 체결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난항을 겪었다. 이렇게 난항을 겪은 이유는 한국의 농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하의 농민운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미FTA가 체결된 상태의 농민의 상황
소작쟁의, 농민조합운동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을 보였는가 정치경제사적 접근을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1920년 이전에 있어서는 야학등을 지원하고 정치적 활동을 제한적으로 했던 조선인 대지주들이 1930년대를 지나면서 총독부와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농민운동과의 적대적 관계로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