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은 율곡 이이를 정통으로 이어받아 조선성리학을 심화시키고 현실에 적용하여, 조선후기 영정조 문예부흥을 이루는 근간이 되게 하였던 사상가였다.
송시열을 둘러싼 논쟁은 아주 다양하다. 60년대 70년대에 평가한 조선후기의 모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나라가 피폐해졌는데도 지
송시열은 이러한 17세기 조선사회의 변화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퇴계나 율곡에 비해서도 조선 정치사상계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송시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
송시열이 이 경향을 대표하는 학자, 정치가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송시열은 국보 239호로 지정된 초상화속의 노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 초상화 속의 송시열은 노인답지 않은 날카롭고 고집스러운 눈매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초상화의 작자는 송시열이란 한 인간이 그때까지
1. 들어가며
허목과 송시열은 1600년대의 조선이라는 같은 시기를 살며 라이벌 관계를 보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추구하는 학문적 색깔이 분명하였고 각자의 영역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허목은 동인에서 비롯된 남인 계열이었고 송시열은 서인에서 비롯된 노론 계열이었다. 이들이 보인
김집은 그의 문하에 있던 송시열을 추천 하였다. 1649년 기축봉사에서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에 부합하여 북벌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었고,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전할 것
2.예를 강구하여 상사에 애도의 뜻을 다할 것
3.학문에 힘써 마음을 바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