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상 일시 후퇴론을 주장하여 휘하의 주 병력을 평양으로 회군시켰다.
그러다 이여송은 일본이 강화하려는 뜻을 알게 되었고, 경략 송응창에게 비밀리 그들과 교섭할 것을 건의하였다. 송응창은 명 조정에 보고하기보다 독자적인 판단을 하였고, 심유경을 서울에 보내 왜군과 접촉하게 하였다.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
명군은 처음 요동유격 사유,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이 들어오자마자 평양을 공격하였다. 물론 요동군은 일본에 의해 참패하였지만,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일본이 북진을 완전히 접는 이유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군이 평양 이북으로 진군할 여력이 없
9월 12일 [양력 10월 16일]<무진>
<장계에서> 당항포 승첩계본을 받들고 올라간 전생서(전생서:궁 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
르는 일을 맡아보는 종6품의 주부) 이 봉수(이봉수)가 가지고 내려온 우부승지(이국)의 서장
내용에, " 전쟁이 일어난 이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패퇴하였는데, 이번 당항포 싸
●임진왜란 배경 및 원인
1590년 일본 열도의 정권을 잡고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스스로는 타이코(太合)라 칭하며 그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 한편 15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