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
수신사(修信使)가 되어 1876년 2월 22일 수신사로 임명되었다.
일본을 다녀온 후, 체일(滯日) 중에 보고 들은 바를 왕에게 복명별단(復命別單) 김기수, 일동기유, 『국역 해행총재』10, 이재호 역, 민족문화추진회, 1982, p.507~515 에 부록되어 있음.
으로 올린 외에 따로 「일동기유(日東記遊)」와 「수신사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근세 한일교섭의 시초였다. 이때 쓴 수기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서양에서 전래된 기술문명의 위력을 처음 목격한 충격을 전했다.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 1876년(고종 13)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의 일기.
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근대 한일교섭의 시초이다. 이때의 견문을 기술한 《일동기유(日東記游)》 《수신사일기》 등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폐쇄되었던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신사유람단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1879년 덕원부사(德源府使), 1881년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고, 1893년 황
Ⅰ. 개요
한국기독교의 뿌리는 만주에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활동한 이수정(李樹廷)은 성경번역 사상 놀라운 일을 하였다. 1882년 9월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永孝)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 이듬해 1883년 4월 29일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