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면을 사용한다. 가면의 종류는 여러 가지 이다. 위선적인 것과 위악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내면의 본성이 어떠하든 어떤 사람의 본모습을 결정하는 데에는 가면의 역할이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 뿐만이 아니라 소설의 세계에도 그것의 역할은 등장한다. 그리고
‘쑈리킴’의 마지막 단락이다. 이에 등장하는 이름이 없는 주인공 소년은 이미 전쟁 이전의 순진성을 지닌 소년이 아니다. ‘쑈리킴’이란 명칭이 지시하듯이 전쟁에 부모를 잃고 이름을 잃고 미군부대 주변을 부랑하는 고아요, 인생과 사회의 치부를 알대로 알아버린, 동심이 훼손된 아이다. 즉 그는
순진성 속에 악마가 끼어 들 틈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이러한 무한한 지식욕이 지옥에 떨어질 만한 무거운 죄라고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레싱이 썼다고 하는 파우스트의 결말은 종전의 파우스트와는 달리 파우스트를 악마의 희생물로 만들지 않았다. 거기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천사들에 의해
순진성’이 그가 경험한 농촌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문구의 소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순박한 농촌 생활의 모습은 산업화 속에서 발생한 부정적 요인들에 의한 농촌의 피폐와 타락을 부각하여 그리는데 기여하는 일종의 서사적 배경이라고도 볼
순진성이 없었다. 나는 아이 단계를 거치지 않은 셈이었다. 나는 아이일 때 벌써 아카데미적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한마디로 신동이었다. 미술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피카소는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였다. 1895~1896년에 그린 <첫 영성체>는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가장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