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두 가지 방향에서 보여지는 것은 영국의 경건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결 안에 있는 참 믿음과 함께 루터의 칭의론에서 말하고 있는 참 믿음에 대한 열망이다.
슈페너는 그 당시 네덜란드의 위대한 학자들인 정치학의 대가(大家)로서 신스토아주의(Neustoizismus)의 대변자인 유스투스 맆시우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1687년 회심 사건을 통하여 프랑케는 사변적인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독일의 할레에서 루터교 목사로 그리고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그의 선생이자 동료인 슈페너가 제안했던 경건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교육 사업
교리가 순전하다고 믿고 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 설교자의 강론을 경청하는 것, 성례전이나 교회 의식에 참가하는 것 등이 기독교인 생활의 전부였다.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로 두 가지 반응이 대두하였는데, 그것은 곧 합리주의와 경건주의이다. 합리주의는 정통주의의 지적 기반에 관해 의문을 제
주 내에 전 독일을 휩쓸었고 1개월 이내에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1518년 루터는 95개조 논제 해설문을 발표했다. 논제 해설은 처음에 교황에 대한 경애와 충성을 보이면서 전개하다가 후반부에는 노골적으로 반 교회적 선언을 하고 나왔다. 1521년 루터를 로마카톨릭에서 영원히 추방하라는 최후의 파문
대한 서사시 내지는 설화들과 이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뜻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신학이라는 개념을 초기 기독교의 변증가들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개념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theologia 라는 개념은 신론 특히 삼위일체론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