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창이라는 음악적인 측면의 연구와 시라는 문학적인 측면의 연구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학자들간의 의견이 분분하기만 할 뿐 시조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현재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시조를 경기체가처럼 경직된 형식에 치우쳐 일부 지식인만의 전유물로만 회자되다가 생명력을 잃게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글로 지어졌고 노래로 불려졌던 이 시조는 문학상으로 ‘시조시형’이란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음악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불려져 왔다고 하겠다. 정병욱, 같은곳
이러한 명칭을 가진 시조의 유래와 형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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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창의 대립이 생겨났다. 가곡은 가장 빠른 곡조 삭대엽만 남고 그것이 다시 세분화되었으나 직감적인 흥밋거리를 찾는 추세를 따르지 못해 밀려났다. 가곡에 비해서 격이 낮은 시조창이 더 행세하게 되어 1863년(철종 14)의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를 비롯해 시조창을 위한 시조집이 따로 여럿 필
시조창작과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가’, 1928년 ‘율격과 시조’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시조 연구를 중심과제로 한 가요 연구회도 조직한다. 한편 삼남 각지를 돌면서 우리말과 문학에 대해 강연하고 고문헌을 수집하는 일도 계속한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이 되고, 1932년
시조창으로 연행된 문학이었다. 몇몇 곡조가 정해져 있고, 여기에 시조 작품이 개별적으로 대응되는 방식이었다. 이 때에는 시조 작품 그 자체보다 가락과 곡조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시조의 개별적인 고유성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