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경제성장이 존재하였다고 규정하였다.
’ 등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준거에서 국사 연구의 쟁점들이 논의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이로써 상호 간에 크게 교류가 없던 국사학계와 경제사학계가 본격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장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3.2.식민지근대화론의 한계김
2.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요 내용
한국인에게 일제식민지 시절이 일제에 의한 수탈의 시절이 아니라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결코 식민지 시절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 시
것이다. 특히 식민지 수탈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은 이 입장을 단호히 부정하고 있으며 식민지를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들 사이의 논란은 아직도 명확한 해결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식민지 수탈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내용을 살펴보고 논쟁의 한계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한국 근대법의 역사는 일본의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논할 수 없다. 자립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던 구한말의 우리나라는 열강의 간섭 속에 타율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율적인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통치가 확정된 이후부터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 제국주의 정권의
근대화론 주장자들은 미곡 소비량이 줄어들었어도 잡곡등 기타 음식으로 1인당 열량섭취를 유지한다고 주장하지만 1인당 잡곡소비량도 1937년 0.9289석에서 1944년에는 0.6833석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송순, 식민지 조선경제의 종말, 398쪽 표 3-23참고, 신서원, 2000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농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