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균, 최현배 5인의 집행위원을 두고 조선어사전의 편찬작업이 시작
1936년에 편찬사업이 조선어학회로 넘어가면서 이극로, 이윤재, 정인승, 한징, 이중화가 전임 집필위원이 되어 어휘카드의 초벌풀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해방까지 원고가 분실됨
해방 후 다시 찾은 원고로
신명균 등의 지사나 학자들과 알게되고, 민족문화에 대한 학술서적을 탐독한다. 또한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와일드 등에 탐닉하고 이어(1938)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에서 한용운을 만나 불교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9년 동인지 「백지」를 발간하여 1939년 4월 「문장」제3호에 <
신명균(申明均) 등이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에 모여 ‘조선어연구회’로 한글모를 재건하였다. 1931년 1월 10일의 총회 결의에 따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광복 뒤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광복 뒤 1949년 까지 학회 명칭을 조선
주로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발전된 국어 연구의 결실로서, 1930년 12월13일 조선어학회가 총회의 결의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하고,권덕규ㆍ김윤경ㆍ신명균ㆍ이병기ㆍ이희승ㆍ이윤재ㆍ장지영ㆍ정인승ㆍ최현배 등 위원 12명이 2년 동안 심의를 거듭한 결과 1932년 12월 원안을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