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신미양요 1871)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37-141>}}의 영광을 얻은 토마스(RobertJeremian Thomas) 목사가 1865년 만주 땅 고려문(고려문 corean gate){{청(청)은 만주 일대를 청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이를 성역으로 정하고 거주민의 유입을 금지하는 한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였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 되었습니다.
3. 결 과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 이 후 전국의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도 싸우지 않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이라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Ⅰ. 흥선대원군의 집권
조선왕조의 양반관료체제는 19세기 들어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세도정치 하에서 과거제도는 문란해지고 관리들의 불정부패는 극심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인사행정은 혼란해져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뇌물로 관직을 획득한 지방관의 탐학과 가렴주구로 농민들의
병인양요
1866년(고종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에 대한 프랑스군의 침입 사건.
1866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이 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
양요, 신미양요를 초래했고, 서양문화의 수용이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민비와 유림 등의 반대 세력에 의해 실각하게 되었다.
3.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된 경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유입된 천주교가 기존의 주자학의 신념체계를 흔들어 놓았고 이러한 사상적 침투는 주자학적 사상에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