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인들 또한 흔히 “ 제 2차 대각성운동”으로 불리는 왕성한 부흥운동과 함께 19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흥운동은 신생 국가의 뉴잉글랜드, 컴버랜드 밸리( Cumberland Valley) 및 서부 뉴욕의 세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 변경 지역, 특히 남부의 종교적 사회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
마허,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등의 현대 자유주의의 신학사상의 도전은 끊임없이 한국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회론은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 전반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특히 청교도적 보수신학을 지향해 온 한국 장로교회
. 1932년 겨울 그는 귀국을 하여 1936년 동안 평양에 있는 학교의 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송창근의 도움으로 특별기고가가 되었다. 문제는 아빙돈 성경주석 사건이었다. 어떻게 리버럴한 아빙돈 성경주석에 참여할 수 잇는가하여 장로교에서 문제삼아 기고가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것은 니콜라우드 쿠사누스와 같은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중세 말기의 신학자에 의해 이론적인 뒷받침성을 받고 있었다. 근세인과 현대인이 중세적인 신율적 질서를 거부하고 근대적인 자율적 질서를 추구하는 이유도 최소한 그들의
서론
1. 근대교회사 해석문제
근대의 인간 중심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한 세계관의 변화이다. 종말론은 에드워드를 통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 정착된 후, 프린스톤 개혁주의자들은 이 후천년설을 자신들의 종말론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자율의 시대,” “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