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숫자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하전투에 동원된 명과 조선군의 숫자는 최소 11만, 최대 13만에 달하는 대군이었고 이에 반해 누르하치 군은 6만여 명 정도로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화기도 명군이 우세였기 때문에 침착하게 싸웠다면 승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승부 정도는 거둘 수 있었
Ⅰ.광해군의 내력
1. 시대 상황
① 국외 -명·청 교체기
○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온 것이 부담이 되어 국력이 한층 약화.
○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 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중심이 되어 통일운동을 전개.
→ 1616년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하고 누르하치는 ‘왕’이라 칭함.
②
시대상황
국외
전통의 강국인 명나라의 국력 약화
압록강 북쪽 여진족 내부에서 누르하치의 통일운동
→ 1616년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하고 누르하치는 ‘왕’이라 칭함.
국내
조정은 동인, 서인, 북인, 남인으로 분열
전쟁으로 인한 전국토의 황폐화, 민생고
재정적 어려움, 전쟁
머리말
光海君은 그의 순탄하지 않았던 삶만큼이나 후세에 들어 평가 또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를 內治와 外治를 구분하여 살펴보자면, 내치의 재정분야에서 양안과 호적의 재작성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양안과 호적이 소실되어 호
심하전투'의 참전과 패전, 인조반정 등 일련의 숨가쁘게 전개되던 17세기 초의 파란과 격동을 '중화적 세계질서' 속에서 겪어왔던 조선에게 '오랑캐 왕조'인 청의 등장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조선이 그 같은 사상적 입장을 취했던 바탕에는 여전히 '재조지은'이 자리잡고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