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학의 디카이아르코스, 음악론의 이리스토크세노스, 자연학의 스트라톤은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BC 1세기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을 편집, 간행하고 나서부터는 그 주석이 이 학파의 주된 직업이었다. 529년 유스티아누스황제가 고대철학의 교수를 금지한 후로
자연계를 이데아의 모방으로 보고 예술은 이를 다시 모방하는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참다운 실재인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놓는 것으로 인정,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데 대하여 그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고 하고 비극의 호용은 울적한 기분을 발산시켜 정신을 "정화(katharisis)"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을 주석하면서 포르피리오스가 논의를 미뤘던 문제들을 다시 문제 삼음으로써 비롯되었다 - 유(類)와 종(種)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가, 다시 말해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지성 안에만 즉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 안에만 있는 곳에 불과한가? 만일 독자적으로 실
자연’(Physis)의 대립에 구체적 상대주의를 볼 수 있다. 고대의 Nomos는 보편 타당한 법이었지만 소피스트에게는 규약과 합의에 의해 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영원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규범 도 파괴될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법이란 본질적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이
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그 근본 사상은 덕(德)은 지(知)라는 것이었고, 제자인 플라톤은 이데아론 사상을, 또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만들었다. 이 아테네기의 철학은 고대철학의 최성기였다.
〈제3기〉헬레니즘 로마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