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송서》〈백제전〉에서 비롯되어《양서》《남사》등의 남조계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령유에 대한 기사는 일찍이 선각들에 의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에 대한 긍정설,부정설그리고 백제가 아닌 마한, 부여, 낙랑의 다른 세력이 주
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는데, 그뒤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고 씌어져 있다.
송 다음 왕조인 남제의 뒤를 이은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
백제와 고구려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전방위외교를 추구하여 당시 급박했던 동아시아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자 외교노선을 변경하여 백제부흥전선에 참여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왜국은 위기의
●백제문화의 일본전파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왜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고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왜는 백제로 부터 불교와 한자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고 백제는 왜로 부터 군사인력을 제공 받은 것으
백제국사가 있다. 양 직공도에 등장하는 백제국사의 복장은 고이왕의 자대수포 청금고를 연상하게 한다. 즉 의복색은 동일하지 않으나 우임 대수포로 사로 만든 단포이며, 발에는 백제 고유의 반장화를 신고 있다. 그런데 이 포는 『양서』 열전 제이 백제조에 보면 복삼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양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