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가 이끄는 부대가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쳤던 곳이다. 지금도 양헌수 기념비가 남아있다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
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 병인양요(1866)
배경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병인 박해 )
전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략 ->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항전
결과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와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지른 뒤 철수
영향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강화,
양헌수가 이끄는 군의 매복에 걸려 사망 6명, 부상 300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치도로 후퇴. 결국 조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1870년대 :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관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을 거느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