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나름의 발전력을 얻어 다양한 제재와 사작寫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대시인인 왕유(701-761), 이백(710-762), 두보(712-770)에 힘입어 시의 형식과 내용의 지평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들 대가들을 통하여 율시와 절구의 발전은 극에 달했다. 특히 두보는 엄정한 율격적 바탕에
송대의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던 구준(寇準), 범중엄(范仲淹), 포증(包拯)도 모두 죽은 뒤에 염라왕이 되었다고 믿어왔다. 이렇게 속인이 염라왕이 된다고 믿는 전승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을 법하다. 김시습은 그러한 민간전승을 이용하여, 현실계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시인들은 한층 절실하게 사회의 부정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시하였다. 백거이의 <진중음>이나 <신악부>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장한가>나 <비파행>과 같은 소설적인 구성을 가진 이야기 시를 만들어 서민층에 많이 읽혔다. 백거이 등과 대립된 다른 한 무리의 시인 의중형은 무늬에 있어
마음은 도리어 남아보다 피끓는다(身不得, 男兒列; 心却比, 男兒列)”고 하며 누가 감히 문단에서 남존여비를 말할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조설근은 <홍루몽(紅樓夢)> 제1회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평생 세속에 쫓기며 분주히 지냈건만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다. 문득 지난날 함께 노닐
중국의 경전에 대한 실력을 시험하여 등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에 중국어 교육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관은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 필요하였을 것이나 한국의 문헌 기록에는 삼국사기 궁예전에 처음으로 역학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