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이 결혼식을 위장해 계엄군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집회를 열었고, 80년 5월 1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계엄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도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는 군사독재 권력 연장 야욕을 숨기지 못했다. 79년 12월 12일에는 12.12 사건을 일으켜 군부 내 반대파들을
함석헌 평전』, p.17
그러나 함석헌 역시 시대 내의 변수를 뛰어 넘을 수 없고 인간이고, 본래 컨텍스트에 적응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시대에 영향을 받고 많은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경험을 주고 받으며 그의 삶을 만들어 나갔다.
첫째, 함석헌은 민족주의자였다. 함석헌이 어려서부터 조선왕조는 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Ⅰ. 들어가는 말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가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에서 말했듯이 인류는 끊임없이 ‘도전’과 ‘응전’을 반복하며 그 결과 문명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결정되어진다. 19세기 조선은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함석헌이 태어난 시기는 국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이 극심하게 대두된 시기였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그 폐해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조선조 말기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때였다. 이에 일본은 자신의 패권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첫 희생양으로 조선을 선택하였고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