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생활을 폭로, 풍자한 소설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그를
열하일기』가 완성되기도 전에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연암의 글을 베끼고 본받으려 했을 정도이다.
『열하일기』는 엉뚱하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됐다. 중국에 다녀온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나가 비교적 여유로운 저술활동을 하던 중 규장각 문신인 남공철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 즉 정조가 당시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으로 불리는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이 조선 정조 때에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
그 뿐 만이 아니라 열하일기는 저자의 생존 당시에 있어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열하일기의 영향을 가장 중요한 「조선사상사」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연암박지원(1737~1805)가 청나라로 입연한 것은 정조 4년으로 이때 연암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년후 홍국영이 물러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그 해(1780- 정조4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권유로 청나라 사절로 북경에 갈 때 최말단의 신분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여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