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도 중세사회의 모순이 터져 나오던 시기였으면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재편되는 사회질서 속에서, 성리학에 대한 자생적 비판과 외국 문물의 전래를 통해 지식 영역이 한껏 확대되고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넓은 세계관이 형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상과 미발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논쟁을 벌이기 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외암 이간(1712)이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순선한 것이
입장이 몰락하는 소토지 농민 일반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된 것 같다. 그의 생활상의 처지는 실상 몰락하여 가는 농민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가난이 날로 심하여 송곳을 꽂을 땅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성호문집 권 20)고 하는 것은 저 같은 처지를 잘 나타
예학적 생활관을 중시한 노론 계열의 향반가였고, 부친 역시 노론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유생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소년기를 보낸 백남운은 봉건적 주자가례와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백남운이 봉건적 세계관을 완전히 벗어나 근대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것은 1912년 수원농림학교에 진학
Ⅰ. 성리학(주자학)의 성격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하여 전개되어 가는데 퇴계의 이기불상잡의 강조, 사단칠정의 이기호발이라는 입장과 율곡의 이기혼륜무간 사단칠정의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이 각각 그들의 문도로 이어져 크게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라는 두개의 학파가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