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소설가이며 호는 상허로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21년 휘문 고보를 거쳐 1926년에서 1928년 가을까지 일본 죠오치대학에서 배웠다.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고, 1928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학생》, 《신생》등의 편집에도 관여했다. <조선일보>, <조선 중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안남도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
오몽녀(五夢女)`가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등단, 귀국 후 「개벽」사에 입사하여 잡지 「어린이」에 동화와 수필을 발표했다. 미문으로 일제 하 하층민의 삶, 지식인들의 고뇌 등을 그려냈으며 `구인회`동인의 한 사람으로 기자생활과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문학
C 상허(尙虛)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서 아버지 이문교씨와 어머니 순흥안씨 사이에서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문교씨는 철원공립보통학교의 교관, 덕원감리서 주사를 지낸 그 지방의 지식인으로서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시국에 불만을 품
원작과 개작 비교
오몽녀>는 1925년 7월 13일 "시대일보"에 발표되는데,
그 후 "이태준 단편선(1939)"에는 개작되어 재 수록된다.
기본 골격은 유지한 채로
200자 원고지 60매에서 약 40여매로 축소 개작된다.
원작 애초부터 처를 삼으려고 아홉살 된 오몽녀를 삼십오원에 사다 길러온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