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관군과 의화단을 격파하였고, 8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농성 55일에 접어든 여러 나라의 공사관원들을 구출하였다. 서태후와 광서제(光緖帝)는 시안[西安]에 피신하고 실각한 수구파에 대신해서 실권을 쥔 양무파는 연합군에 협력하여 의화단 잔당을 학살하였다. 1901년 베이징의정서[北京議定書:
서이다.
載垣等復不能盡心和議, 徒誘獲英國使臣, 以塞己責, 致失信於各國.
재원등부불능진심화의 도유획영국사신 이색기책 치실신어각국
재원등은 다시 마음을 다해 화친논의를 하지 않고 한갓 영국사신을 유인해 붙잡아 자기 잘못을 막아 여러 나라에 믿음을 잃게 했다.
澱園被擾, 我皇考巡幸熱
서광서제가 밀림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이 중국이 근대사에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서태후를 중심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것이 ‘신정’ 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정을 통해 중국이 근대사의 거친 세파 속에 어떤 역사적 행보를 걸었는지를 알 수 있
却說?徒中彈墜下, 放彈的人, 是皇次子綿寧。
각설교도중탄추하 방탄적인 시황차자금녕
각설하고 교도는 탄환을 쏘아 추락해 떨어지니 탄환을 쏜 사람은 황제 차남 금녕이었다.
皇次子時在上書房, 忽聞外面喊聲緊急, 忙問何事?
황차자시재상서방 홀문외면함성긴급 망문하사
황제 둘째 아들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