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野鹿]과 같은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泗河)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서울[王都]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 혹은
위해 여러 차례 원병을 청하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서자 25(624)년에 당에 조공을 하여 당고조(唐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사비궁을 중수하고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관륵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 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하였다.
④ 해독(解讀)과 현대역(現代譯)
왕흥사)라 하였다. 이에 진평왕(신라)은 백공을 보내고 이를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참고하면 백제는 왕권과 미륵 신앙을 결부시켜 통치와 호국의 수단으로 미륵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으로 가람 가람이란, 스님들이 머물면서 불상을 모셔놓고 수도
Ⅰ. 개요
조소에 있어서 백제의 대표적인 것은 불상 조각이다. 부여 군수리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곤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하며 백제 독자의 온화함에다가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백제 불상의 특징은 고졸한 미소를 띠운 온화한 표정과 날씬한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