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에 高麗에 미치는 元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내정개혁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건국 초기 明은 元과의 경쟁에서 정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와, 遼東地方을 비롯하여 雲南, 蜀등지를 장악하지못한 상태에서 동북아시아에서 大邦으로 인식되던 高麗와 朝貢冊封關係를 맺음으로
却說劉鋌被殺, 全軍喪亡, 大衆入枉死城中, 還是莫明其妙。
각설유정피살 전군상망 대중입왕사성중 환시막명기묘
莫明其妙 [m? m?ng q? mi?o] ① 영문을 모르다 ② 이유를 모르다
각설하고 유정은 피살당해 전군이 다 죽고 대중은 잘못 저승 성에 들어가니 다시 이유를 몰랐다.
實則夾入的杜軍, 統是滿
Ⅰ. 문제 제기
위화도 회군과 조선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과정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위화도 회군을 통한 개혁정치는 시대 변화에 순응하고 역사 발전에 기여 했는가, 아니면 구호에만 그친 허구의 지배 이데올로기인가.
Ⅱ. 위화도 회군 전후의 정세
1. 고려 말의 상황
고려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314년에 낙랑군 남부도위였던 대방군도 공격해서 얼마 후 이를 함락하였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때 낙랑 ·대방의 두 군에 거점을 두고 있던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과 연년(連年) 공방전을 벌이다가 민호(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라고 주장하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옛날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성계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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