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신라시대 월명사의 법호와 법명
월명의 정체성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승려들은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지닌다는 것을 통해 그의 아이덴티티를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법호는 일반적으로 지명(地名), 사명(寺名), 산명(山名), 경전 속의 인물 내지 교리 내용, 시호(諡號) 내지 자(
1.서론
현재 전해져 오는 향가는 25수이다. 그 중 삼국유사에 있는 향가는 그 중 14수이다. 그 향가의 저자를 보면 고승들이 많은데, 그 고승들이 글쓰는 방법으로 선택한 방법 중 하나인 향가를 통해 어떠한 가르침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특히 경덕왕 때의 충담사와 월명사
-향가의 최고수 월명사
신라 경덕왕(742-764)대에 향가 도솔가를 지은 월명사는 당대 향가의 최고수이다.
월명사가 활동하던 경덕왕 대는 신라의 최전성기였지만, 사실은 신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던 경덕왕 대가 내리막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로 경덕왕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반을 확고
3.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의 뒷모습
월명사와 최치원은 신라시대 향가와 한시의 최고 작가였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달밤에 혼자 피리를 불며 거리를 배회한 월명사와 전국을 떠돌다가 가야산에 은둔한 최치원의 뒷모습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행적은
신라 불교 르네상스기에 문화인으로 살았던 월명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신라 불교의 성격과 문화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일생을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살았던 가객 월명은 7세기 후반 이후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풍류인이었다. 그는 삼국의 물리적인 통일을 넘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통일을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