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이유
박아지 시인은 박세영·이찬 등과 함께 ‘새조국 건설’에 대한 평소 신념을 좇아 북으로 넘어간 월북시인으로, 해방전에는 카프계열의 시인 중에서 유일하게 농민을 소재로 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여러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만 언급한 채 어떤 시를 지었으며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
않는 중립적인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광복 직후에는 좌익문학 단체에 관여하다가 그 후 전향, 보도연맹이라는 우익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 발발과 동시에 북으로 납북/월북되어 보도연맹이 벌인 최초의 민간 집단인 학살 등, 극우적인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들 가운데서도 정지용은 당시의 획기적인 전환을 실질적으로 실천해 나간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한국 시단의 성과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새로움과 영향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30년 가까이 일반인들에게
Ⅱ. 본론
1. 문장파 예술가와 정지용
1) 문장파 예술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고 민중이 수탈당하는 현실에서 지식인들은 민족적인 관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이것의 시작은 1926년 5월 육당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
. 서 론
오장환은 서정주, 김동리, 함형수, 김상원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숙한 시인으로 월북하기 전까지 많은 시작품을 남겨 우리 현대시사에 큰 공정을 남겼다. 그러나 그를 월북문인이란 명목으로 오랫동안 철저히 금기해 왔기 때문에 전혀 논의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