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매체들마저도 속속들이 더 편하고 쉬운 기능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빠르고 신속한 세계에의 도입을 끝없이 유도하며 온 세계가 한 덩어리로 운동하게 하여 각자의 멋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유입된 문화들이 우리 고유의 문화를 점차 잠식해 가고
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이다. 《계축일기》의 작자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쓴 것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
덕수궁 자리는 원래 왕궁이 아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궁궐은 불에 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이 곳을 임시 궁으로 삼고 이름도 ‘시어소’라고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