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전쟁이다.(1562-98)
그래서 프랑스의 개혁 운동을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 할 수 있다. 초기의 개혁운동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들은 로마 교황이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프랑스 왕에게 양보하기로 조약을 맺은 1516년부터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위그노(Huguenots)파는 앙트완 드 부르봉(AntoinedeBourbon), 루이 드 콩데(Louis de Conde) 그리고 꼴리니(Gaspard de Coligny) 제독의 지휘하에 무력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한동안 꼴리니는 샤를르 9세의 신임을 받으며 두 교파간의 화해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그는 모후 메디치의 사주에 의해 암살되고, 이틀 후 파리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
위그노의 실체를 인정
* 교회에 대한 요구
- 위그노들이 점령하고 있는 교회당들을 반환할 것을 명령
- 위그노의 예배는 도시 밖에서 허용
- 도시 안에서는 개인 집에서만 가능하다고 명시
1562년
* 로피탈이 위그노에 대하여 관용적인 정책을 펴도록 카트린을 설득
- 투옥된 신교도들을 석방,
평화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가짐
• 위그노 저명 인사에 대한 암살이 급격히 증가
앙부아즈 평화조약을 위반하는 내용의 위그노 규제 심화
→ 결국 1567년 전쟁으로 이어짐
• 카톨릭파의 총사령관 몽모랑시 전사
• 롱쥬뮤(Longjumeau) 협약을 맺고 휴전 – 앙부아즈 평화조약 재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