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을 단일의 국민국가로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각각 개최되었지만 ‘협의대상 선정문제’ 표면상으로는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미소공동위원회와 같이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
◎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이후 결과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음
미소 양국 간 불화가 고조 됨
미국의 지지세력인 우익진영의 격렬한 반대로 탁지안의 포기를 불가피하게 됨
소련은 북에서 반탁운동을 억압, 좌익 세력으로 찬탁운동 전개를 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의 이행을 촉구하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내용의 한국통일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인구가 남한보다 적은 북한이 총선거에 불리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1948년 초부터 활동을 시작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고, 결국 1948년 3월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유엔이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였으나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