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품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엿볼 수 있다. 박명준, 앞의 논문.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에는 절도사 고변의 막하에서 「격황소서」를 지어 문명을 떨쳤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이룬 출세의 한계와 외국인으로서의 소외 및 고독으로 인해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신라에서 한림학사
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도한 6두품과 호족
1. 육두품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불리우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있었다.
왕이 교체 되었고, 귀족세력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또 육두품 세력은 골품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사회건설을 추구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지방호족과 해상세력이 출현하였다. 또한 불교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된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여기저기서 민심을 모았다.
Ⅰ. 머리말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국가이다. 이는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심에 입각해 통일기반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新羅)’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