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신앙은 원죄의식 속에 깊숙이 내려져 있다. 윤치호는 먼저 자신 속에서 이원제를 체험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끊임없는 영적갈등 속에서 진지한 도덕적 자성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의 일기 전편을 통해 현장감 있게 표현되고 있으며 그의 윤리의식은 철저하게 내향적인 자성의 윤리
개화기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한말 개화, 자강 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윤치호. 일제시기 여러 단체의 주요직에 있었으며 조선감리교의 대부였던 그를 대부분 친일파라고 평가한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주로 1938년 이후 나타난 행적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38년의 적극친일행위
Ⅰ. 윤치호의 생애
1. 청년기의 윤치호
정치가로서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좌옹(佐翁)이다. 충남 아산(牙山) 출생이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아버지 때에 이르러 가세가 재건되었다. 아버지는 무관출신으로 군부대신을 지낸 웅
윤치호의 모습에서 당시 유산층 개혁가의 전형적 행동양식을 엿볼 수 있음.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서재필, 윤치호 등 미국을 선망하던 개화파들은 시민혁명을 겪은 미국을 선망하되 자신들이 시민혁명을 재현할 생각은 하지 않음.
(박노자,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윤치호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근대부르주아사회를 지향한 '自由民權思想'이라고 규정한 많은 연구가 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주로는 이들이 자유주의 수용 과정에서 보였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유의하면서, 자유주의가 처음 도입되고 거론되던 시기의 유길준의 경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