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나. 소나무 숲 사이에 솔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 올 것이라 생각되어 멀리 바라본다고 하였다.
(3) 이곡(二曲)은 어드매고 화암(花巖)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곳츨 띄워 야외(野外)에 보내노라
살이 승지(勝地)를 몰온이 알게 들 엇더리
*화암 : 바위 이름. 꽃바위
*춘만커다 :
구사하여 특출한 언어미를 보여 주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를 더해준다.
2. 율곡이이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1) 생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강원도 강릉 북평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俶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구이든 간에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는 이미 자명한 실천명제로서 그들 앞에 놓여 있다. 고인의 길을 따르는 배움의 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인 것이다.
其四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할을 버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르
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2) 율곡이이의 사상
율곡은 사상적인 조예 못지않게 문학에 대한 조예 또한 깊었으며, 사상적으로 한국의 유학사상을 집대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한국의 유교문학이론을 체계화하였다.
1) 문학의 정의 : 문이형도(文以形道)
3) 고산구곡가가 후대에 미치는 영향
구곡관련 문화의 향유 즉 주자의 무이구곡을 동경하는 가운데 무이구곡도를 감상하거나, 차운시를 창작하고, 개별적인 구곡을 경영하는 일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행보와 발맞추어 율곡의 고산구곡 역시 구곡관련 문화의 일부를 차지하며 독자적인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