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에 접어들어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어갔고, 게다가 러일전쟁의 전황도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어 갔다. 일본은 이제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함께 한국의 보호국화 결정을 내렸다. 그 구체적인 실행 방법은 다음과 같은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탈취하여 일본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민족적 울분을 건드리는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역사라는 것은 그 공과를 따진다 하여도 소급하여 바로잡을 수 없다는 점이 공과를 따지는 행위자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역시 미래사로서 과거사를 공부하기 위함인가?
한일병합에는 어떤 국
Ⅰ. 러일전쟁의 배경과 당시의 국내외 상황
1) 러․일간의 갈등과 전쟁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을 맺었다.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은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조약의 내용 중 제4조는 다음과 같다. ‘청국의 사
Ⅰ. 러일전쟁의 배경과 당시의 국내외 상황
1) 러․일간의 갈등과 전쟁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을 맺었다.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은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조약의 내용 중 제4조는 다음과 같다. ‘청국의 사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