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닌 것은 아니며 성정에 근거하여 당시를 포괄하는 폭 넓은 시야와 전망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 작품의 폭도 이에 대응된다.
그러나 충암의 시 작품을 정독해 보면 그의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지향은 그의 삶과 시론에서 예견되듯이 도학적 성향과 연결된 부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도 중세사회의 모순이 터져 나오던 시기였으면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재편되는 사회질서 속에서, 성리학에 대한 자생적 비판과 외국 문물의 전래를 통해 지식 영역이 한껏 확대되고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넓은 세계관이 형
精神과, 孟子의 「사생이취의」 하는 義의 義理精神이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宋明代에 이르러 儒學의 理論과 體系를 새로이 定立하게 된 根本原因은 思想的으로 道家와 佛家의 刑而上學的 理論體系에 儒家思想이 대항하기 어렵게 되자. 그 問題를 극복하고자 한데 있었던 것이다.
의리론적 인식을 우암과 주자에서 찾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화서가 호락논쟁의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화서학파의 형이상학이 기호학파의 분파적 배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종합하고 지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서 이항로의 철학 사상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 준수하고자 하였다.
예의 준수는 성리학의 의리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 소인(小人)의 분별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예를 둘러싼 복상 문제(服喪問題)나 예송(禮訟)의 시비가 당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