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구는 ‘프랑스의 문학예술이 굵거나 음산하거나 강렬하거나 잔인하지 아니하면서 인생 현실에 대한 가장 명석한 통찰과 또는 인간의 자유로운 향혼(香魂)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헌구, 불문학영화와 조선, 『조광』 1939. 7, 167쪽.
확실히 프랑스의 문학예술은 의미 중심의
이헌구, 정인섭 등과 알게 되었고, 28세 때에는 귀국하여 중동학교 영어교사로 있으면서 동아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한편,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35년「시원」에 <고독>을 발표하였고, 첫시집 『동경』이 간행된다.
36세 때인 1941년 2월 21일 수업
이헌구, 정인섭 등과 알게 되었고, 28세 때에는 중동 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동아,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한편 극예술 연구회에 가담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했다. 해외 문학파의 후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영미문학의 수입 소개에 노력
이헌구, 정인섭 등과 알게 되었고, 28세 때에는 중동 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동아, 조선 일보에 글을 쓰는 한편 극예술 연구회에 가담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했다. 해외 문학파의 후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영미문학의 수입 소개에 노력
문제 삼았던 것과 달리, 이헌구를 비롯한 해외문학파는 시종일관 임화를 ‘번역가, 해석가’로서 문제 삼는다. 조윤정, 위의 논문, p.396
1933년에 작성된 이헌구의 「평론계의 부진과 그 당위」에서 임화는 이데올로기라는 척도로 독재를 행사하는 ‘정책평론의 아류’, ‘정밀한 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