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불어 서인-남인 연립정권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이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후에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김창협으로 이어진다.
1.의미와 발단
한국 성리학에서의 보편논쟁으로 불리며 학맥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호락(湖落)논쟁이라고도 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보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낙론이라 하고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호론이라고 한다.
18c 이전에도 인성과 물성에 대한 논의가
그 후 큰 오빠의 죽음과 형제들 중에 각별했던 오빠 녹문마저 떠나 그녀의 슬픔은 더욱 컸다. 『윤지당유고』속의 몇 개의 제문 중에 오빠 녹문에게 올리는 제문을 보면 그 마음의 상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윤지당은 만년에 독서와 저술에 힘쓰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성동(成童)으로 정한 점 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아동관은 아동의 발달단계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전반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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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동발달의 단계
예기, 소학, 논어, 태교신기, 동의보감 등의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