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위원회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던 8월 15일 밤, 여운형은 서울에서 제일 먼저 새 조국 건설의 깃발을 내걸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이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도 건준 지부라든가 자치대, 치안유지위원회 등 다양한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8월 17일 이북 지역의 중심인 평양에서 조만식을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결성을 지원하였다. 이어 1946년 2월 소련은 중앙행정기관의 모태가 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947년 2월에 창립된 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설치, 헌법초안 작성, 조선인
1) 조선노동당의 위상
조선노동당은 북한의 모든 권력의 원천이다. 북한 헌법 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모든 국가 기관들은 조선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인민위원회는 3,7제 주장( 소작료 30%납부)하였고, 미군정은 3,1제를 주장(수확물 1/3을 지주 몫으로)하였다. 이에 소작농들은 어느 쪽의 개혁이든 대환영하였고 경자유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토지개혁문제가 친일파 청산과 함께 중요 문제로 부각되면서 좌익 주도의 전국농민조합 총연맹(전농)
▶ 6월 30일 : 미행정부 한반도 해안봉쇄 및 지상군 파견결정
7월 1일 : 미 지상군 선발대 부산 도착
7월 7일 : 미국과 인민군의 첫 교전
6월30일 인민군은 3일간의 정적을 깨고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한편, 29일 한 국을 방문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고 30일 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