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은 명국의 참전으로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이 형성, 전개되었고, 조명 양국은 16세기 말~17세기초의 선조, 광해군, 인조 대를 거치면서 '재조지은 체제'가 각각 형성, 변형, 복구되는 관계를 경험한다. 명의 도움을 받아 임진왜란을 극복했고, 광해군의
이전)의 통신사
조선 건국 후 1403년(태종 3)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책봉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도 ‘일본국왕日本國王’ 책봉을 받아 조선․중국․일본간에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국가로서, 조선 국왕과 일본 막
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황폐화 백성들은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림.
○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 전쟁 이전으로의 복구가 시급한 상황.
2. 즉위과정
○ 1575년 선조의 후궁인 공빈(恭嬪) 김 씨의 소생으로 태어남.
○ 친형님인 임해군을 둔 둘째 왕자.
▶ 엄격하게 따지면 임금이 될 수 없는 처지.
이전으로의 복구 시급
2. 즉위과정
- 선조의 후궁인 공빈(恭嬪) 김 씨의 소생
- 친형님인 임해군을 둔 둘째 왕자
→ 임금이 될 수 없는 처지, 명나라에서 세자로 인준해주지 않음
- 신하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장, 선조의 거부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채
마지막으로 인조시대 외교정책 특징의 세 번째로는 외교정책에 대한 국왕 인조의 안일한 태도이다. 인조시대의 고위 정치가들은 명나라를 따르면서도 후금과의 전쟁은 자제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급 관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면서 후금과의 일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