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 일제시대에 발행된 민족지에 대한 평가는 세갈래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일제하의 두 신문을 문자 그대로 민족운동의 표상으로 보는 관점이다. 임근수 이해창 최 준 등 대부분의 전통적인 입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해창은 [동아일보]의 사명관을 분석하면서 이 신문을, 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결국 계층분화를 촉진하고 민족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또한 3·1운동 이후 1920년대 들어서면서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었던 사회주의사상은 식민통치로 야기된 한국 내부의 갈등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농민·노동자의 계급의식을 각성시키는 한편,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사회에 횡행하던 '가짜 김일성 론' 이라는 허구가 폭로되었으며 다른 한편 북한에서 쌓아온 김일성 신화화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2.출생과 성장
김일성의 요람을 둘러싼 사상, 기독교 민족주의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3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성주 였
민족주의로, 혹은 총독부 권력과 언론의 갈등관계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1910년부터 1919년을 ‘민족지가 없던 시대’, 1919년에서 1940년까지를 ‘민족지의 출현과 굴절’로, 1940년 이후는 ‘민족지 소멸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고 자포자기를 유도하며 전향운동에 한층 열을 올렸다. 전시 비상체제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유지해 둔 채 탄압책만으로 통치질서를 유지하면서 전시총동원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위협과 회유로써 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