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일본의 개입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 임오군란 당일 지방으로 도망갔
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立이 크게 침해되고 있었다. 반면 청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에서 민씨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
1882년 6월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임오군란)은 1876년의 개항,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등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동안의 연구가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사 부분에만 치중되어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민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의식의 미성숙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군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재집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이에 본 조는 과연 이러한 기존의 일반적인 통념과 이미지가 맞는 것인지 또한 그들의 권력 싸움이 조선 시대 몰락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분명히 주었을 것이란 생각에 이들의 대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임오군란’을 중심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