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세계를 심화ㆍ확대해 나간다.
월북 직후 박태원은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전속작가로 있으면서 주로 창극 대본을 써『조선창극집』(1953)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한 후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가 1960년에 작가로 복귀하면서 체제 순응적이며 혁명적인
>(<<여명>>), <오월의 훈풍>(<<조선문학>>) 등 많은 작품을 발표.
1934년 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 씨와 결혼. <딱한 사람들>(<<중앙>>),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조선중앙일보>>), <애욕>(<<조선일보>>) 등을 연재.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청춘송>을 연재. <<개벽>>에 <길은 어둡고>를 발표.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열어 보였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정지용이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월북작가 박태원과 정지용문학의 존재방식(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북한문학사에서의 위상평가에 대해서도 비교분석해 보기로 하자.
배제된 순수문학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2) 모더니즘의 부각
1930년대 순수문학의 창작경향은 비유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나타났으며, 작품의 예술성이 평가 절하되던 앞 시대와는 달리 작품의 형식과 기교에 주력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이광수(李光洙) · 계광순(桂光淳) 등 납북 인사 33인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사당하였다. 이 장에서는 월북작가 박태원과 정지용문학의 존재방식(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북한문학사에서의 위상평가에 대해서도 비교분석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