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선생이었던 노도사가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887년 9월에는 우리나라에서최초로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고 10월에는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1901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창식, 김기범 두 사람이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Ⅱ. 장로교회의 역사장로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죄, 사회에 선한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부분들의 회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 교회의 일치, 갱신, 섬김의 대안도 제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이루어지기 위한 근본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기독교 핵심인 예배로부터 오는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한미 FTA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한미 FTA는 정치,군사적 동맹의 기초 위에서 초국적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것으로, 절대 다수 인민의 삶과 생존의 파탄을 예고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교회들은 우리들은 FTA
장로교 선교사들이 부산을 선교본거지로 한 것처럼 서울에는 여러 교파의 본부가 주재하고 있어 경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연회로부터의 완전한 분립은 1907년에 시행되었다. 리드 목사가 최초의 남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윤치호장로가 시종여일하게 협력하였음은 두말 할 것 없
한국에 입국한 아펜젤러, 언더우드 손에는 이<마가복음>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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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정치사회적 태도와 시민사회변화
1. 시민사회의 변화와 기회영역의 변화
87년 이전 개신교 장의 정치사회적 태도는 간략화하자면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대립으로 간략화 할 수 있다.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