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일파’ 장지연
최근 이러한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되어 서훈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미디어에 보도된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고, 그에 상반되는 입장들을 함께 생각해보려한다.
아래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
Ⅰ1910년대 언론상황
1. 시대적 배경
1910년 7월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의 병합에 착수했다. 수상 이완용은 데라우치에 호응하여 국무회의를 거쳐 8월 22일 한일합방에 관한 조약에 서명 조인했다. 통감부는 일본 군대와 헌병을 풀어 삼엄한 경계망을 펴게 한 뒤 8월 29일 이른바
시대적 배경
한일합방직전 언론통제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7월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6개 신문사 사장과 발행인을 불러 신문검열을 강화할 것이라 경고.
- 대한제국 내에서 관장하던 신문검열 → 통감부 직접 검열
- 조선어 신문이 인심을 선동하는 기사와 비분강개
1940년 2월 16일 「매신」 ‘국민문학의 의의’라는 제하에
민족문학 말살시킬 것 강조
1940년 7월 1일 「매신」 논문 - 조선 문학의 황민화 주장
1941년 1월 21일 「경일」 논문 ‘중대한 결심’을 발표
1941년 3월 11일 「매신」 논문 ‘문인의 웅소’를 발표
1941년 7월 6일 「
장지연, 안익태와 홍난파, 김동인과 서정주등을 친일인사로 규정한 인명사전을 공개하자, 인명사전에 오른 인사들의 유족이나 후손들은 납득할 수 없다며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보수단체들도 "전문성을 갖췄다고 보기 힘든 집단이 국론을 분열하려 내놓은